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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이 경상남도 밀양군 무봉산 아래 능파강 위의 영남루 복쪽 언덕에 있으니 곧 대군께서 봉군을 받으신 궁성의 옛터이다. (사실이 여지승람과 권근의 본조유사에 실려있음)舊譜를 살펴보니 숭정 七년 갑술 (1634년) 에 현령 四吾堂과 菊潭壽春등 37인이 밀양부사 이유달과 이곳에 사당을 세워 대군을 향사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이로부터 삼백년간 뒷 사람들이 개연히 뜻을두고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일이 매우 중대하여 합의 하기가 어려웠다. 신라기원 1981년 갑자(1924)에 밀양박가 종중의 주최로 전국에 통고하여 크게 종회를 영남루에서 개최하고 설단하여 향사할 것을 의논하였으니 이해 5월3일의 일이다.
삼가 고찰하니 임술(1922)년 봄에 원덕사를 옥천에 짓고 대군을 향배 하였더니 그해 윤5월 13일에 큰비가 쏟아져 흙이 패인 뒤에 영남루 북쪽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나타났다. 이 때 근처에 사는 사람이 보고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사람이 와서보니 과연 오랜된 묘자리였다.이에 종회장 박용대, 부회장 바숭억, 전 군수 박상일, 교리 박해철 주사 박태진 박장억 등이 듣고 곧 살펴 보아서 밀양의 노인들이 옛부터 전해 오는 말에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부근에 있다고 한것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님을 이로써 믿을만 하나 地石이나 확실한 고증이 없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도리로 감히 의심이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등한이 보아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에 설단을 하고 비를 세워서 따로 제각을 짓고 향사한다면 마음에 미안함이 없고 의리에도 당연히 행할 일 일 것이다.곧 단 세울 터를 관에 신청하니 다음해 게해년(1923) 겨울에 허가되었다.드디어 그 자리에 돌을 깔고 단을 모으고 단상에 비를 세우니 단지가 12평이었다.각 면에 다듬은 돌을 깔고 상하양방에 대를 쌓고 대위에 돌아가며 석난간을 두르니 석주가 모두12개요 높이는 한 길이 넘었다. 또 쇠줄로 옆에 석란과 석주를 꿰어 쳐서 사람이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한가운데의 축단한 비면에 신라왕자 밀성대군의 단이라 쓰고 전면에 향로를 두고 향로 양쪽에 아래로 무장관 대석을 세우고 문주위에 두개의 둥근 유리 장명등을 꽂아놓고 쇠로 자물쇠 노와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금하고 문밖 두곁에 석대우에 각각 사자석이 있다. 표성금 사실은 또한 그 아래 돌을 세워 새겼다. 영남루에 소속되었던 능파각은 지금은 단사무소가 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