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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19년 기미년 3월 상순 고종황제 국장에 참례하고 경향 각지의 3월 1일 국권 회복의 대한독립만세 궐기 정황을 견문 후 귀향한 김상구 김종태는 동년 3월 10일 사립 문명학교장 김우곤 댁에 동지 다수를 모아 대한독립만세 거사를 모의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대한독립회를 조직하다. 동야 삼경을 기해 회원 손기현 김재화는 박창기 댁에서 독립회결의문을 다수 작성 운문면 전역에 살포 부착하다. 일편 독립회결사를 사립문명학교에 두기로 하고 학교장 김만곤 교사 김진효 손한조의 동참으로 김상구 손기현은 일간 매일신보에 보도되는 전국 각지의 대한독립 만세상황을 신속히 파악하는 일방 면내 각 동리에 독립회원을 밀파하여 동참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회 조직을 강화시켜 거사 택일을 고대하다 동년 3월 18일 독립회 활동정보를 입수한 운문 왜경주재소는 면내 독립회 소속 청장년 전원을 거 3월 15일 살포 부착한 독립회결의문 필적조사 명목으로 호출하다. 신원 오진 방음동을 비롯한 수남지역 독립회원 김진효 김상구 김종태 김종식 강재식 손한조 김재화 손기현 김대선 손진하 김용구 김종수 박재수 홍해성 김상원 홍해성 홍용성 홍창성 등 20여명은 왜경주재소로 출두차 집합 행진하면서 시시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학도가를 부르며 기세당당히 대천동에 도착 지촌 공암 서지동 등 수북지역 독립회원 박영묵 이용환 최성희 김문근 윤병림도 출두차 대천동에서 합류하다. 동일 오전 회원들의 심문조사가 끝나고 주막에 모여 점심을 먹는 좌석에서 홍해성 김진효 회원이 오늘 이 시점이 독립만세거사의 절호의 기회임을 주창하자 좌중일동이 직각 동조 궐기하여 면사무소를 급습 점거하고 김종태 소지의 2척짜리 명주 목수건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독립회기를 제작 이를 하늘 높이 휘두르며 김진효의 선창으로 우렁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왜경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다. 만세군중 대열에는 면서기 이용환 임봉처 백신열 김경수 최현규 등이 동참하고 대천동 독립회원 박영찬 박재영이 동민 다수를 합세시켜 수많은 만세군중의 대한독립만세소리는 충천진동하다. 만세군중의 기세에 겁먹은 면장과 왜경은 혼비백산 도망하여 국권을 쟁취한 의기의 만세군중은 기쁨에 넘쳐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동야 삼경에 이르러 군중은 2군으로 나누어져 수남지역은 방음 오진 신원 삼개동을 순회하며 밤새껏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수북지역은 공암동의 강정과 연당지를 돌며 밤세워 만세를 외치다. 동년 3월 19일 왜정은 운문지역 비상사태의 긴급함을 느껴 동일 영시를 기해 운문면 전역에 왜경을 충출동시켜 남녀노소 구별없는 체포검거의 태풍을 일으키다. 피검된 면민의 고문의 비명은 산야를 울렸고 타상의 유혈은 계천을 적시다. 독립회 본거지인 신원동의 왜경 탄압의 검거 참상은 일층 가혹하여 수많은 부녀자에 대한 왜경의 난폭성은 극에 달하였다. 이에 격분한 동민 김석곤은 나팔을 불어 전 동민을 집합케하고 김의택 김병준 강성봉 김한구 김동치 김주한 김만술 최구약 김도지는 몽둥이를 들고 왜경 총검에 대항 대한인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냐고 외치며 왜경의 발포로 입은 총상에서 흐르는 선혈을 뿌리며 돌진하여 피검된 부녀자를 구출하고 왜경을 도망케 하다. 오호 통재함이여 국운의 쇠퇴와 시운의 불리로 증원된 왜경에게 대다수 독립회원이 피검되어 왜경 대천주재소와 청도경찰서 고문취조실은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회원의 토혈이 고여 쪽박으로 피를 퍼내는 참상을 이루고 긴 세월의 옥고와 평생 사회활동의 제약 속에서 원한의 일생을 임종하다. 세월의 흐름은 역사의 진실을 잊혀지게 하기도 한다. 이 땅에 생을 얻은 우리들은 용감하고 고귀한 청사에 빛나는 기미년 3.18 대한독립만세의거를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이 돌에 역사의 사실을 세겨 천만대에 길이 남기다. 서기 2000년 8월 15일 ○양인 홍영기 찬, 김해인 김갑수 서, 창원인 황병섭 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