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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간도신흥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외에서 의열단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의열단 결성 당시 참여한 인물은 황상규·김원봉·곽재기·윤치형·신철휴·이종암·이성우·윤소룡·서상락·김태희·배중세·이낙준·강세우 등으로 단장인 의백에 김원봉을 선출하고 무력투쟁·직접행동을 통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자는 기본방침을 수립, 국내 전국에 걸쳐 적기관의 파괴와 교란·암살 등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의열단 조직후의 첫 사업은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였다. 1920년 초 그는 곽재기 등과 만주로부터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 먼저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20년 6월 구영필의 밀고로 사전에 피체되어 1921년 6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이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의열단원 이종암의 세칭 '경북의열단사건' 및 1928년 '청주일심단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후 1928년 10월 신간회 고령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