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뱚2021년 8월 31일 (음 7월 24일) 화요일(신라기원 2078년) 2007년1월24일창간 제176호 12면(월간)뱚 고객에게븮信友븯같은 기업으로다가서는븮신우수출포장 븯 1999년 설립,고객의 상품이 뷺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뷻 최선을다하겠습니다 신우수출포장은 대구 경북권 100여군데업체의 수출을책임지고 있는우수한기업입니다. 대한민국1등수출업체 신우수출포장 대구광역시달서구성서서로270 TEL:(053)591-0213,0013/FAX:591-0214 대표박재한밀성박씨전국청년회고문(제6대회장) 호남 인재의 산 실이자 민족교육 의 선구자적 역할 을 하여온 전북 정 읍의 영주정사와 전남 담양 창평의 영학숙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사) 정 읍 역 사 문 화 연 구소(이사장 김재영) 주관으로 ‘한국근 대사에서 영주정사와 영학숙의 위상 및 역할’ 주제로 지난 7일 오후1시부터 17 시까지 전북 정읍시 청소년수련관 1층 에서 개최되었다.이날 대회는 코로나19 의 제4차 대유행으로 제한된 인원(100 명 이내) 때문에 방청하지 못하고 밖에 서 경청하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영 주정사 건립이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 고 취와 지식함양이 항일과광복을 위한 것 이었음을밝혀나갔다. 김재영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영 주정사와 영학숙에 대한 첫 학술대회인 만 큼 지 역 사 와 지 역 문 화 사 , 한 국 민 족 운동사에 관심 있는 시민과 연구자들의 많은참여를바란다”고당부했다. 영주정사 설립자 창암 박만환 선생의 증손자인 박철 현종은 이날 마지막 토론 에 앞서 증조 할아버지의 훌륭한 정신을 할머니로부터 듣고 자랐고 수많은 소장 품을 간직하고 지내면서언젠가 대중 앞 에 할아버지의 유지를 알리려 하였으나 우선 금전적 제약과 무지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렇게 성대하게 학술 대회를 열게 되어 정읍시와 김재영 이사 장을 비롯 학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 고, 코로나 대유행과 혹서기에도 많을 관심을 갖고 함께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 사의인사를전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오후 1시 30분 개회 에 이어 내빈소개, 국민의례, 축사, 제1 주제 ‘근대이행기 호남인재의 산실 영 주정사와 영학숙(김재영 정읍역사문화 연구소 이사장)’, 제2주제 ‘고부의 근대 유학과 영주정사(이진우 재단법인 동학 농민혁명계승사업회 학술분과 위원 장)’, 제3주제 ‘창암 박만환과 영주정사 (권수용 재단법인 호남학호남진흥원 연 구위원)’, 제4주제 ‘춘강 고정주의 근대 교육기관 설립운동(김상욱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제5주제 ‘한말~일제강점기 영주정사 출신 인물 들의 활동(정원기 전북역사교육문화연 구소 책임연구원)’ 종합토론 및 질의 응 답순으로진행되었다. △‘근대이행기 호남인재의 산실 영주 정사와 영학숙’ 주제 발표를 한 김재영 이사장은 호남인재의 산실이자 민족교 육의 선구자적 역할은 정읍의 영주정사 (흑암동189-2/정읍 등록문화재212호) 와 창평의 영학숙에서 담당했다 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결론적으로 박만환이 세운 영주정사와 전남 창평 출신의 고장 주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 으로 돌아와 세운 영학숙(英學塾)은 신 학문인 영어를 가르쳤으며, 호남지역의 구학문과 신학문을 대표하는 교육기관 으로서 호남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다고 할수있다고밝혔다. △‘고부의근대유학과영주정사’를발 표한 이진우 위원장은 간재 전우의 학맥 을 이은 고부(정읍)의 선비들은 국권상 실의 위기 속에서 유학의 정통을 지키려 는 움직임이 강했고그 중심에 박만환의 영주정사와 그의 아들 박승규의 승동학 교가 건립되어 인재를 양성하였다고 주 장했다. △‘창암박만환과영주정사’를발표한 권수용 연구위원은 박만환은 국권이 무 너져감에 따라 향교의 건물도 무너져 내 린 것을 보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서 영 양사를 지어서 유생들의 귀의처로 삼고 자 하였다. 즉 교육의 필요성을 느낌과 동시에 유학자들이 결집할 장소도 염두 에 두었던 것으로 구한말 조선 천지가 외 세 의 각 축 전 장 이 되 어 있 는 암 담 한 상 황과 시골의 개인으로서 어찌할 수도 없 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영주정사와 영양 사를 세워서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전 통을 지켜가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간재 전우가 증정시에서 말했듯이 박만 환은 ‘사교(邪敎)를 배척하고 은사금을 물리친 송백과 같은 지조와 짝할 자 없 는 높은 의리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 다.라고창암박만환선생을소개했다. △‘춘강 고정주의 근대교육기관 설립 운동’을 발표한 김상욱 목포대학교 도 서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영학숙과 창 흥의숙은 호남지역 근대교육의 텃 자리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교육의 요람 을 이루고 가꾼 사람이 바로 춘강 고정 주 였 다 고 소 개 하 고 영 학 숙 과 창 흥 의 숙 을 통한 춘강의 교육활동은 당대에 꼭 필요하였던 교육의 계몽적 기능을 충족 시켰으며, 학교시설도 아직은 보잘 것 없 었 지 만 구 학 문 을 바 탕 으 로 신 학 문 을 조화시킨 그의 교육관이 반영되어 걸출 한 민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고전했다. ▶관련기사2면,3면,10면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 net) 호남인재양성의산실영주정사·영학숙재조명학 술대회 민족운동과그역사적의의조명븣정읍역사·문화적상징성확장계기마련 일제강점기항일투쟁은교육을통한 지식함양에서이루어진다며영주정사를건립,수천권의서책을보유하고인재양성을해온 창암 박만환선생과 영 주정사를고찰하는학술대회가열린가운데관계자들이 함께하고있다. 증손자 박 철 창암 박만환 선생존영 판사시험 합격 후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아 편안한 삶이 보장 되었음에도 왜놈 들 밑에서 녹을 받지 않겠다며 광복운동 에 몸 바쳐 온 대한 광복회 총사령 박상 진 의사 순국100주기 추모행사가 경북 경주시내남면노곡리묘소에서있었다. 이날 행사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본 행사장인 묘역에 50인 미만 출입을 제한 하면서 묘소 입구에서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태극기를 손에 든 지역 주민과 후손들이 고인의 애국 우국정신 을 기리고 넋을 추모 한 가운데 행사는 전통적인 묘제와 보편적인 추도식을 함 께하는 방식으로 개회, 진혼곡, 국민의 례, 약력소개, 추모공연(진혼무), 추모 사, 유족대표인사, 헌과 및 분향, 만세삼 창,독립군가제창순으로진행되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분향과 헌작,배례 에 이어 추모사를 통해 의사의 출생은 울산이지만 4살때부터 경주에서 자라온 우리 지역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임에도 경주시로서는 추모행사를 처음 개최하 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고 부끄럽게 생각 한다고 말하고 선양하는일에 매우 소홀 하였음을 각성하지 않을 수 없어 이를 반성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대대 적인 정시사업에 착수하였다며 지방도 904호선에서 국도 7호선 다리 밑까지 수 해복구 일원으로 다리를 새로 놓고 폭 8 미터 확장, 국도 7호선 밑에 주차장 설 치, 진입로는 품격 있도록 하고 계단을 대리석으로 축조하여 보다 많은 참배객 들이 묘소를 찾아 넋을 기리고 애국 우 국정신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선양하는 성지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어 경주시는 울산시 못지않게 박상진 의 사의 정신을 이어받는 일에 더욱 정진하 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고귀한 희생에 감 사드리고 명복을 빈다며 추모사에 갈음 했다. 서호대 경주시의회 의장은 헌작에 이 어 우리는 의사님을 비롯하여 일신을 초 개와 같이 버리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을 토대로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의 발전된 조국을 이루었다며 이제 우리는 의사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고 의사님 의 거룩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발전시켜 나갈 것을굳게약속드린다고말했다. 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음력 12월 6일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밀양 박씨 밀직부원군 諱 중미(中美)의 후손 으로 승지 박시규와 여강이씨의 장남으 로 출생하여 백부 교리 시룡에게 출계하 였다. 16세에 왕산 허위선생 문하에 입 문하였으며 22세엔 양정의숙에 입학하 여 법 률 경 제 학 을 전 공 2 7 세 에 판 사 시 험 에 수석 합격 평양지법 판사를 발령받았 으나한일합병직전,국정을통찰하고부 임을 거부하였다. 공부를 하는 동안 을 사늑약 체결을 보고의분하여 청국 외교 관 번종예를 따라 천진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고 국내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 며 1909년 26세에 안창호, 신채호, 양기 탁, 이갑등과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교 남교육회와 달성친목회에도 활동을 하 였다. 또,손일민등과 여관을 설치하여 독립 운동의 연락기관으로 삼고 1912에는 삼 정 물 산 에 전 답 을 저 당 잡 혀 빌 린 자 금 으 로 김기덕,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 븮상덕 태븯라는 곡물상회 설립하여 겉으로는 무역업을 겸한 곡물상으로 속내용은 독 립운동기지및 각종 연락기관 자금 조달 기관으로 삼았다. 이후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당시의 중국신해혁명을 본보 기 삼아,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 적으로‘대한광복회’를결성한다. 그의 나이 32세,1915년 7월 15일이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 는 총사령으로박상진이,부사령으로이 진룡이임명되어활동이시작되지만,이 진룡의 체포로 의형제 김좌진이 뒤를 잊 는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를 비롯하여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 천, 서울, 해주 및 만주의 안동, 장춘에 설립된 곡물상, 잡화상을 연락거점으로 하여군자금을모았고,친일부호들과금 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을 대상으로 하여독립군자급을마련하였다. 1917년 겨울부터 1918년 봄까지 ‘대한 광복회’는 최대 수난기 및 ‘이종국’의 배 신으로, 결국 박상진은 체포되어 3년 6 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8월 11일 서 른여덟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의 교수대 에서 순국하여 온 천하의 사람들이 슬퍼 하고애석하게여겼으며,형무소간수는 “의인이 세상을 뜨니 천지가 깜깜해지 고 시정에는 점방문이 모두 다혔다”라 고하였다. 유해(遺骸)를 운구하는 동안 일제는 기마병을 동원 추모인파를 막고 결국 장 지에는 10여명이 지켜본 가운데 13일 안 장되었으며, 고향 울 산으로 가지 않고 경주 내남면 노곡리 백운산 자락에 안장 된 것은 경주최씨 가문의 장인이 본인의 장지로 잡아 놓은 것을 사위의 장지로 내 놓아 장례를 치룬 것이다. 생부가 망 자(亡子)의 제문에 장지는 녹문구산(鹿 門臼山)까지 운구할 힘이 없어, 그만 너 의 장인어른께서 전에 잡아 놓았던 등운 산(登雲山) 기슭에 장사 지내게 되었었 다.라고전한다. 한편 정부는 1963년 국민장을 독립장 을 추서하였으며, 경주시는 조국을 위 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의사 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사업비 3 억 8000만원을 들여 ‘박상진 의사 묘 주 변 정비공사’를 추진하고, 먼저 올해 1 억 8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중인 묘 역·진입로 정비 및 주차장 조성 사업을 연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내년부터 사 업비 2억원으로 인근 904호 지방도에서 묘역까지 진입로를 확장해 접근성을 높 인다는계획이다. 박상진 의사의 묘역 정비사업은 경주 에 거주하는 밀직부원군의 후예 재양씨 의 제보로 지역언론에서 의사의 묘소가 봉분이 내려앉아 민망하다며 대서특필 되고 경주시 주낙영 시장과 서호대 의 장 , 박 경 동 문 중 회 장 등 이 적 극 나 서 이 루어졌다고의회관계자는전한다. ▶관련기사3,4면 대한광복회총사령고헌박상진의사순국100주기 추모제 경주시묘소성역화사업으로의사의정신을이어받는일에더욱정진할것븣녹문구산 (鹿門臼山) 까지운구할힘이없어,그만너의장인어른께서전에잡아놓았던등운산(登雲山)기슭 에장사지내 광복군총사령고헌박상진의사의순국100주기추모행사에서서호대경주시의회의장의선창으로 만세삼창을하고있다. 주낙영경주시장이 분향하고있다. 독립군가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