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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파리장서(長書) 제1절 유림의 태도와 파리장서 1. 파리장서(長書)운동의 동기 민족대표33인의 이름으로 독립을 만방에 선언하고 온 민족이 거족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총궐기한 것은 유구 한 역사 민족 혈관에서 약동하는 자연 발생운동 이라 뉘라서 감히 이 정의의 대열을 막을 수 있었으랴? 오직 강도적 일본 의 강권주의 침략주의자들 만이 이 운동을 탄압하라고 상투적인 만행을 자행할 따름이었다 . 이 운동을 지도한 33인의 대표의 구성 인물은 천도교·기독교·불교등 3대 종교단체의 소속으 로 되어 있었으나 유독 유림단 의 이름만이 빠져 있다는 것은 많은 의문을 남겨 놓았다. 이조(李朝)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정치 사상적 뒷바라지는 물론 일상 생활에 까지 깊숙 히까지 침투한 유교와 유림단이 제외되고 지금까지 이단시(異端視)해 오던 다른 종교단체만이 이 나라의 구국충정에 타오른 인상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림의 입장으로 부끄럽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유림계에도 우국지사며 한말의 명성을 떨친 큰서비 면우 곽종석이며 또는 시대를 앞서 내 다 보고 선진적 식견을 가진 우 국지사 심산 김창숙 같은 분이 있었으나 그 반면에는 아직도 18세기적 민족주의 사상과 봉 건적 쾌쾌묵은 사상이 머리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부 인사가 남아 있어서 지난날 우리 역사를 그릇친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 는 못된 생각과 의병항쟁 시기 특히 전기 의병항쟁 시기에도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는 대항의식은 같으면서 동학운동을 이단시 사갈시하고 타매하던 사고 방식을 아직도 씻어버리지 못한 일부 인사가 있어서 손병희 등 동학혁명에 관여하였던 인물은 상놈이라 하 고 시대 착오적 사고방식을 불식치 못한 인물이 유림중에 기생하고 있어 의식적으로 이 운 동에 관여할 것을 회피하고 있 었지나 않았을가? 3·1운동이란 이 민족적 회천의 대업을 추진하고 있는 손병희 등 선각자들이 명실이 상부한 거족적운동으로 전개시키기 위 해서는 과거에 반민족적 과오를 범한 자라도 모두 포섭한다는 큰 아량을 가지고 이완용(李 完用) 같은 인물까지 민족대표 중에 한 사람으로 넣으려고 포섭한 사실까지 있었는데 억하심정으로 유림을 민족대표 중에 넣으려는 교섭을 아니하였을리 가 없었다. 혹은 33인중 불교대표 한용운(韓龍雲)의 말을 인용하여 “3·1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최측에서는 곽종석을 유림대표로 내정하고 한용운으 로 하여금 곽종석(郭鍾錫)을 거 창으로 방문한 즉 곽종석은 직석에서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나 연락의 지 연으로 마침내 서명에 불참되었 다 하고 또 한용운의 법정조서에는 곽종석을 거창으로 찾아 갖다가 24일에 상경하여 본즉 일본 정부에 제출할 서류 이외 에는 이미 인쇄가 완료되었다.” 고 운운한 기록이 있으나 이런것은 모두 변명에 불과하여 유림으로서는 3·1운동 주최측에 가담해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김창숙(金昌淑)이 3·1운동 당시 성태영(成泰英)·김정호(金丁鎬) 두 동지에게 언명한바 “오늘날 우리들이 왜적의 노예가 된 것도 유림의 부패한 까닭이요, 또 오늘 선포한 거족적 이며 역사적인 독립선언서에 유 림대표가 참가치 못한 것도 우리 유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요, 충격적인 만큼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대외활 동으로서 전국 유림을 총망라하여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우리의 독립을 국 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오. 대 내활동에 있어서는 손병희와 손을 잡고 유기적으로 국내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당면급무이다 . ”라고 설파하였다. 심산·면우 같은 거성이 있어서 유림계의 면목을 어는 정도 세웠다고도 할수 있으나 거시 적으로 볼 때에 파리장서운동이 3·1운동에서 소외된 수치감 열등감에 대한 자위(自慰)는 될는지 몰라도 3·1운동과는 비교 도 되지 않는 크게 평가할 만한 운동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이 파리장서운동이 일으켜진 동기는 어디에 있었는가? 유림측 의 설명에 의하면 (1) 경술국치 (2) 고종이 독살된 것 (3) 민족자결운동 자유민주주의사상의 팽배 등이 파리장서운동을 일 으킨 원인이라 한다. 또 유림으 로서 충격적 사실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일제가 유림이란 명의를 도용하여 일본 정부에 소위 ‘독립불원서’ 즉 독립을 원 치 않는다는 서면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사실상의 종식은 1918년 11월경이었는데 그 당시 일제는 전후 평화회의 가 열리게 되면 한국문제가 등 장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내다 보고 그 대비책으로 이완용을 정당대표로 김윤식(金允埴)을 유림대표로한 독립불원서를 조 작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케 한 사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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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bw7&articleno=8489923&categoryId=796758®dt=20100829123402#ajax_history_home target=_blank>다음 불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