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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향기 2010·6 김 익상(金益相)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용강면공덕리, 지금의서 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 다. 목재 장사를 하던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재산을잃고, 집안형편이어려워지 자 김익상은 재학 중이던 삼호보성소학교 를그만두고철공소견습공으로취직했다. 1919년경에는서울교북동(橋北洞)에있 던 연초회사인 광성연초공사(廣盛煙草公 司)로 옮겨 근무하게 됐다. 그러다가 1921 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 이나중국으로가게됐다. 김익상은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비행사가되는것이었는데, 중국으로 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기때문이다. 그래서김익상은비행 기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엽연초를 빼돌려 팔아 자금을 마련한 뒤 톈진(天津)과 상하 이(上海)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廣 東)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광둥의 호법정 부는 북벌(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일시중지하고있었으므로뜻을이 루지못했다. 꿈을 접게 된 김익상은 베이징(北京)으 로 건너가게 됐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의 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운명적인 만 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김익상이 조 국광복과민족독립을위해생명을바쳐헌 신할것을맹세하고의열단원이되는결정 적인계기가됐다. 1919년11월중국지린성에서조직된의 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 두와밀정등을7가살(七可殺)로규정하고 일제식민통치기관을 파괴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전개해나갔다. 의열단가입후김익상은김원봉과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 파를 계획했다. 김익상은 1921년 9월 9일 김원봉으로부터폭탄2개와권총2정을건 네받고즉시조선총독부폭파의거를결행 하기 위해 나섰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 여김익상은일본인으로변장하고양복속 에폭탄과권총을감추고9월10일베이징 을떠나11일서울에도착했다. 다음날아침김익상은일본전기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왜성대의 조선총독부 청사 로 갔다. 그리고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 경 전기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 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 에 있는 비서과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 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 탄은폭발하지않았으나회계과에던진폭 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게“2층으로 올라가면 위 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하게 조선총 독부청사를빠져나왔다. 이날의거사는대단했다. 우선회계과에 던진폭탄이맹렬하게폭발해15센티나되 는 깊이로 마루바닥이 파였고, 파편은 벽 과아래층으로튀어응접용탁자가부서지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파한 독립운동가 김익상 선생은 의열단 가입 후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192 1년 9월 그가 전기 수리공 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설치한 폭탄이 폭발해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상하이 로 망명한 그는 이곳을 방 문한 일본 육군대장을 권총으로 저격하다 체포돼 20여 년의 옥고를 치렀다. 글 | 김용달(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34 35 고, 유리창이 깨지고 여러 개의 책상과 걸 상이파손되는등조선총독부청사는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물샐틈없는 경비가 한순간에 뚫려 식민통 치의심장부가공격당한사실이었다. 이로 써 일제가 3.1운동 이후 소위‘문화통치’ 를 펴 식민통치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더 나아가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 이 수그러들어가고 있다는 선전이 허황된 사실이라는것이만천하에드러났다. 의거직후김익상은이태원의아우집으 로 돌아와 있다가 이튿날 평양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다시 일본 의복으로 변장 하고국경을벗어난뒤, 9월17일베이징에 도착하여 약산(若山·김원봉의 호)을 만 나의거사실을보고했다.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 제가반성하는기색이없자김익상은재차 의거를결심하였고1922년2월3일상하이 에서김원봉과앞으로의거사계획을논의 했다. 여기서 김익상은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는데, 그때 마 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 一)가필리핀을방문한뒤3월28일상하이 로 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김익상은 크게 기뻐하여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다 나카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다나카는 조슈(長州)군벌의 우두머리로 일제 군부 의 거물이며, 평소 대외 침략정책을 강력 히주장하는침략주의자였기때문이다. 그 런데 문제가 생겼다. 김익상은 물론 동지 들인 오성륜과 이종암(李珦巖)이 서로 다 나카처단의거를결행하겠다고나선것이 다. 그래서 김원봉과 논의 끝에‘명사수’ 로 알려진 오성륜이제1선에서, 그리고 김 익상이 제2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제3선에서 순차적으로 권총과 폭탄으로 다나카를응징하기로결정했다. 드디어3월28일오후3시30분에상하이 황포탄 세관부두에서 먼저 오성륜이 다나 카에게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 으나앞서나오던미국인스나이더부인이 맞고 말았다. 이에 다나카는 황급히 대기 중인자동차로도망치자두번째로김익상 이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발사했지만, 모 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김익상은 다시 폭 탄을 다나카에게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 했고,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던진폭탄조차바로터지지않자 영국 군인이 강물 속으로 차넣어 버리는 바람에실패하고말았다. 의거직후오성륜은현장에서체포되고, 김익상은 피신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 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 에 붙잡혔고,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피신 중에 벌어졌던 일화는 의 열투쟁이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김익상은 피신 중 중국 순경이 달려 들자 그에게 총탄을 발사했는데, 그것은 그를 향해 발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 해 발사했던 것이다. 그 이유를 의사는 재 판정에서,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 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하 기위해쏜것이오. 하늘을향해쏘았던것 은 사실”이라고하면서, 그때총쏜흉내를 내며웃었다고한다. 김익상은 9월 25일 나카사키지방재판소 에서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에 불복한 검 사측의 공소로 11월 6일 오후 1시 열린 나 카사키공소원의 공소공판에서 사형을 받 았다. 하지만 각본대로 진행되는 일제의 재판에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었고, 또 자 신의 한목숨을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의 제 단에바치기로작정해추호의미련도없었 기때문에김익상은상고를포기해사형이 확정됐다. 이후김익상은그후무기징역으로감형 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돼 21년의 오랜 옥고를 치렀다. 김익상은 28세의 나 이에 의거를 결행한 뒤, 20여 년을 감옥에 서 보내고 노년에 접어든 50세의 나이에 석방되어 귀향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독립운동자들 에대한탄압에광분하던일제가김익상을 가만둘리없었다. 김익상이귀향하고얼마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 니, 어디선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던것이다. 정부는김익상의공훈을기려1962년건 국훈장대통령장을추서했다. 광복의 역사인물고향의향기 김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