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조선왕조 왕릉탐사. 왕실의 릉원묘 분포도및 조선왕실 릉/원/묘 링크 앨범 조선왕조 왕릉탐사. 왕실의 릉원묘 분포도및 조선왕조 릉/원/묘 링크 앨범 64곳의 조선왕조 왕실의 릉원묘의 4,000장의 사진(13기가)의 앨범 리스트
[본문] 조선말의 아픈역사가 담겨있는 영친왕(英親王), 이방자 황태자비의 홍유원내 영원(英園), 의친왕(義親王) , 황태손 이구(玖)의 회인원(懷仁園), 덕혜옹주,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광화당(光華堂) , 삼축당(三祝堂) , 의친왕 후비 수관당(修觀堂) 정씨 조선말의 아픈역사가 담겨있는 영친왕(英親王), 이방자 황태자비의 홍유원내 영원(英園), 의친왕(義親王) , 황태손 이구(玖)의 회인원(懷仁園), 덕혜옹주,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광화당(光華堂) , 삼축당(三祝堂) , 의친왕 후비 수관당(修觀堂) 정씨
[본문] 찾을수 없었던 선조의 후궁 정빈민씨 묘(靜嬪閔氏墓) 찾을수 없었던 선조의 후궁 정빈민씨 묘(靜嬪閔氏墓)
[본문] 숙종 후궁 영빈 김씨(寧嬪金氏)의 남양주 진접읍 장현리 영빈묘 숙종 후궁 영빈 김씨(寧嬪金氏)의 남양주 진접읍 장현리 영빈묘 영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말하기를, “선대 왕조(숙종)의 후궁은 다만 이 한 사람만 남았었다. 일찍이 인현성모(仁顯聖母 - 인현왕후)와 더불어 기사년의 환란을 만났었다가, 갑술년 성모께서 복위되었을 때에 그도 또한 복작(復爵)되었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항상 어머니라고 일컬었는데,
[본문] 효종(봉림대군) 후궁 안빈이씨(安嬪李氏)의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안빈묘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 후궁 안빈이씨(安嬪李氏)의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안빈묘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갈 때 같이 갔다가 1645년에 귀국하였다. 묘표는 1694년(숙종 20)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사위인 금평위 박필성이 글씨를 썼다. 묘비 전면에 ‘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 새겨 있고 후면에 비
[본문] 동작동 국립묘지의 원래 주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묘(昌嬪, 동작릉) 동작동 국립묘지의 원래 주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묘(昌嬪, 동작릉) 창빈 안씨는 연산군 5년(1499) 본관이 안산(安山)인 증우의정(贈右議政) 탄대(坦大)의 딸로 시흥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재질과 용모가 뛰어났다. 중종 2년(1507)에 입궁하여 경전과 법도를 배우고 부덕(婦德)을 쌓았다. 22세에 상궁, 31세에 숙원(淑媛)
[본문] 남양주 화도읍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묘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남양주 화도읍의 묘 장조(사도세자)와 경빈 박씨(景嬪朴氏)의 아들인-은신군(恩信君)-남연군(南延君)의 아들인 흥선군은 고종의 아버지이다.
[본문]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덕릉), 아들 하원군(河原君)의 묘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덕릉), 아들 하원군(河原君)의 묘 중종과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으로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이 선조로 등극하자, 조선왕조 첫번째로 대원군의 지위에 올랐다.
[본문] 강화도령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포천 선단동의 묘 강화도령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포천 선단동의 묘 장조(사도세자)와 숙빈임씨(肅嬪林氏)의 아들인 은언군 (恩彦君)의 아들인 전계군은 정조의 배다른 형제였다. 이 전계군의 셋째아들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였다.
[본문] 소현세자가 잠들어있는 서삼릉내 소경원, 근처에 있어도 갈수 없는 아들 경선군 석철, 경완군 석린의 묘, 광명에 갖혀있는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 소현세자가 잠들어있는 서삼릉내 소경원(昭慶園), 근처에 있어도 갈수 없는 아들 경선군(慶善君) 석철, 경완군(慶完君) 석린의 묘, 광명에 갖혀있는 민회빈 강씨의 영회원(永懷園)
[본문] 인연이 없는 인조의 장릉(長陵)과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석견, 손자 임창군, 임선군, 증손자 밀풍군과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묘 인연이 없는 인조의 장릉(長陵)과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 손자 임창군(臨昌君), 임선군(臨城君), 증손자 밀풍군(密豊君)의 묘, 그리고 명나라 궁녀 굴씨묘(屈氏墓) 인조는 병자호란 이후에 소현세자 대신에 자신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로 왕
[본문] 영조의 생모인,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과 효장세자(진종)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수길원(綏吉園) 영조의 생모,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소령원 (昭寧園)과 효장세자(진종)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수길원(綏吉園) 숙빈최씨는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소다. 숙빈 최씨는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궁녀로서 생활하지만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였다.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남인을 대표
[본문]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휘경원 (徽慶園)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휘경원 (徽慶園) 순강원 묘역 내에는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1589~1645)과 부인 허씨의 묘가 있다.
[본문] 임금을 낳고도 종묘에 들어갈수 없는 한많은 7후궁들의 사당 칠궁(七宮), 숙빈최씨, 정빈이씨, 영빈 이씨, 수빈 박씨, 순헌황귀비순헌귀비 청와대관람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칠궁(七宮), 임금을 낳고도 종묘에 들어갈수 없는 한많은 7후궁들의 사당(숙빈최씨, 정빈이씨, 영빈 이씨, 수빈 박씨, 순헌황귀비순헌귀비) 영조의 생모,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淑嬪崔氏) 육상궁(毓祥宮),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연호궁(延祐宮),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선희
[본문] 같은 태종의 후궁이면서 같은지역에서 사적으로 등록되어있지않은, 경녕군의 어머니 태종후궁 효빈김씨의 아차산 효빈묘(孝嬪墓) 같은 태종의 후궁이면서 같은지역에서 사적으로 등록되어있지않은, 태종의 첫째아들 경녕군의 어머니 효빈김씨묘 효빈묘(孝嬪墓).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한번째 여주 영녕릉 여주 영녕릉을 마지막으로 열한번째 에 걸친 조선왕조 왕릉 탐사를 마무리했다.
[본문] 17대 소현세자 대신에 등극한 봉림대군 효종(孝宗)과 인선왕후의 여주 영릉(寧陵)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옥체를 모셨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본문]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 장릉(莊陵) ,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 장릉,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본문] 17살의 짧은 삶.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17살의 어린나이에 작은아버지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 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본문] 조선왕릉 탐사 아홉번째. 4전5기만에 어렵게 찾아간 융건릉,용주사,팔달문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 조선왕릉 탐사 아홉번째. 4전5기만에 어렵게 찾아간 융건릉,용주사,팔달문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
[본문] 정조대왕의 효성이 묻어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본사 화산(華山) 용주사(龍珠寺)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다. 고려 광종21년(970)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고 낙성식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이름을
[본문] 죽어서까지 아버지옆에 묻힌 효자 정조대왕의 융건릉(隆健陵)내 건릉(健陵)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후 순조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본문] 당파의 희생양이된 사도세자. 후에 추존되어 장조(莊祖), 한중록의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융건릉(隆健陵)내 융릉(隆陵) 원래 휘경동 배봉산(拜峰山)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었으나,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장헌세자는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으며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였고, 장조로 추존되었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세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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